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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상읽기] 행정의 존재 이유
 
2019-08-01 09:39:24

◆ 박수영 한반도선진화재단 대표는 현재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작년 말 현재 우리나라 공무원은 105만명. 그중 대부분인 102만명이 행정 공무원이다. 그들의 존재이유(raison detre)는 무엇일까? 정치가 결정을 내리면 `영혼 없이` 집행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정책결정이나 집행과정에서 제 목소리를 내야 할까?

행정학 과목을 한 번이라도 수강한 분들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정치·행정일원론과 정치·행정이원론이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정치와 행정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에 대한 논쟁인데, 실은 학문으로서 행정학의 시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행정이 정치와 같은 것이라면 독자적 학문으로서의 행정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초기 행정학은 현대행정학과는 달리 정치·행정이원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수였고 뒤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1887년에 쓴 `행정의 연구`라는 글은 행정학의 서막을 연 글이다. 여기서 윌슨은 국가정책에 대해 과학적 판단을 하는 행정은 정무적 판단을 하는 정치와는 다른 존재라는 주장을 했고, 이것이 미국에서 행정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됐다.

윌슨의 주장은 당시 광범위하게 이뤄지던 망국적 `전리품 인사(spoils system)`를 폐지할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선거에서 이긴 정당이 모든 공직을 차지하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주장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 이래, 아무런 전문성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승리한 정당에 소속된 사람을 공직에 마음대로 임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1881년에는 인사에 불만을 품은 지지자가 대통령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전리품 인사` 개혁에 대한 요구는 거세었고, 윌슨은 정치와 행정은 별개여서 정당이 아니라 실력으로 공무원을 뽑아야 한다는 근거를 분명히 했다.

이원론은 학문으로서의 행정학을 정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각국의 현실에서는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말한 것처럼 정치의 정의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면, 행정이 그 배분에 관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정무적 판단`을 바탕으로 가치의 배분이라는 공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행정은 `전문적 판단`을 바탕으로 역시 공익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어느 나라나 행정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현대행정학에서는 일원론이 다수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낡은 이원론이 부활하고 있다. 정무적 판단의 본래적 의미가 크게 바뀌어 국리민복(國利民福) 또는 부민덕국(富民德國)이라는 장기적 국익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정권 재창출 또는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의미로 변질되고 있다.

그 와중에 행정은, 전문적 판단이라는 존재가치를 애써 외면하고 안전지대로 대피하고 있다. 정치가 무엇을 결정하든 행정은 과학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경제개발 시기에, 국가 발전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깊은 사명감으로 불철주야 일하던 선배 공직자와 같은 모습은 찾기 어려워졌다. 24조원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81만명 공직자 증원,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흔들리는 한·미·일 동맹 등 위태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행정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고 `예스맨`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국가의 견제와 균형을 얘기할 때 흔히 입법, 사법, 행정 간의 견제와 균형만을 얘기하지만, 정치와 행정 간 견제와 균형도 매우 중요하다. 정무적 판단과 전문적 판단이 균형 잡힐 때만이 공익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행정의 존재이유이며, 정치가 흔들릴 때 더욱 커져 보이는 것이 행정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행정은 세계적인 흐름과는 동떨어진 채 낡은 정치·행정이원론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한국 정치를 지켜보면서 행정의 존재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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