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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보수의 몰락’이 아닌 ‘수구(守舊)의 몰락’
 
2020-04-28 14:34:32

정치학자들이 진단한 보수의 위기…통합당 참패의 이유와 미래
  
21대 총선 이후 ‘보수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 포함)이 개헌 저지선을 겨우 넘긴 103석을 확보한 반면,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 포함)은 180석의 의석을 가져갔다. 민주당은 21대 국회에서 개헌 외에 못할 일이 없고, 통합당은 개헌을 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전국 단위 선거에서만 4연패다. 보수정당이 총선에서 연달아 진보진영에 패배한 것은 우리 헌정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지금의 구도로만 보면 보수진영은 TK(대구·경북), PK(부산·울산·경남)에서만 다수 의석을 확보한 ‘영남당’으로 축소됐다.

진보진영의 독주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데이비드 런시먼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을 기술한 신간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에서 미국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의 다섯 가지 쿠데타 중 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장악하는 ‘공약성 쿠데타’를 주목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확실하게 종식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쿠데타가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쿠데타가 있는데 공약성 쿠데타가 후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즉, 선거의 결과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균형과 견제라는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왜 이처럼 균형과 견제가 작동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진영이 몰락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권자의 ‘세대’가 달라졌다

대형 이벤트가 터지는 순간 선거판은 요동친다. 이번 총선에선 ‘코로나19’가 그랬다. 코로나19가 국내에 발병한 건 지난 1월20일, 총선 87일 전이다. 이후 약 석 달간 코로나19는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자유한국당(통합당의 전신)이 추진한 보수 통합 과정은 조명되지 못했다. 컨벤션 효과(정치 이벤트 직후 지지율 상승 현상)를 누리지 못한 셈이다. 만약 코로나19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통합당은 원점에서 민주당과 진검승부를 벌일 수 있었을까. 그러기엔 총선 전부터 이어진 보수정당의 하락세가 너무 가팔랐다. 국내 보수정당 의석 규모는 19대 총선 152석에서 20대 총선 122석, 이번 총선에서는 103석으로 연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단발성 이벤트만으로 통합당 패배를 논하기엔, 보수의 열세가 장기화·심화되고 있는 셈이다.

보수의 몰락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들의 전성기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한국 보수정치의 뿌리는 홍태영 국방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논문 ‘남한에서 국민국가 형성과 보수세력 및 보수주의의 구성: 보수혁명으로서 민족주의’(2020, 한국정치학학보)에 요약돼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계기를 통해 보수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국 보수주의는 민족주의를 근간으로 하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의 특수성, 반공주의와 발전주의가 있다. 이 두 가지 축을 통해 한국의 보수세력이 형성되고, (중략) 확장되어 간다.”

즉, 한국 보수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발전에 대한 갈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충족시키며 보수정당은 성장했다. 그러나 이 두 축이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다. 유권자의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청년들은 이제 노인이 돼 광장 밖 ‘아스팔트’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메운 건 전란의 기억이 없는 4050 세대와 2030 세대다. 이들에게 한국의 발전사는 핵심 화두가 아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역사적인 정치 장면은 교과서로 배운 ‘새마을운동’이 아닌 직접 목격한 ‘촛불광장’이다. 그들은 대학생 시절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며 자랐거나, 취업 후 IMF 위기를 겪으며 성장의 한계를 몸소 체감하거나 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반공주의자도 아니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혜택을 톡톡히 입은 세대일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실용이다. KBS가 최근 보도한 21대 총선 출구조사 세대별 투표경향에서 이러한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KBS 조사에서 40대 유권자의 64.5%가 민주당을 찍었다. 통합당을 선택했다고 응답한 이는 26.9%에 불과했다. 50대 유권자 중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이 49.1%로 통합당(41.9%)을 앞섰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21대 총선 결과를 “보수의 몰락이 아닌 수구의 몰락”이라고 전제한 뒤 “과거 박정희 시대부터 이어지는 개발주의 가치를 유권자가 거부하고 있는데 보수가 새로운 질서에 맞게 바뀌지 못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시 “50대 유권자 이하로는 성장이 화두가 아니다. 이른바 ‘386세대’를 비롯해 과거와는 다른 가치를 내세우는 유권자들이 주류로 부상한 것이다. (통합당은)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이에 맞는 전략도 비전도 선뵈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제 보수도 남북 대립보다는 평화 공존의 가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며 대북 강경 노선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권위주의’

ICT(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탈권위주의가 커다란 사회 조류가 된 최근 상황도 살펴봐야 한다. 상명하복식 권위주의에 반감을 갖는 대중이 크게 늘어났다. 이를 보수정치에선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2007년 대선에서 보수진영 후보로 나선 이명박·이회창 후보에게 유권자의 약 70% 가까운 표가 몰린 것은 열린우리당(민주당의 전신) 정부의 무능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2016년 탄핵 정국에서 80%에 가까운 국민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것은 이명박·박근혜 두 보수 정치인의 권위주의와 폐쇄성에 대한 반발 심리로 봐야 한다.

보수정당이 낡은 권위주의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한국 보수정치사의 ‘뿌리’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홍태영 교수는 논문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 보수층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히 몰락했다. 그 빈자리에 제1공화국 시기 적산불하를 통해 성장한 계층이나 박정희의 개발정권 시기에 등장한 지배계층은 국가에 의해 생산되고 국가와 결합해 전반적으로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 속에 형성된 자본가층”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발전주의에 기반해 급격한 자본주의적 성장을 추구했던 이들은 한편으로 반공주의를 무기로 아래로부터의 욕구불만을 잠재우고 발전주의적 성장에 대한 신화를 통해 지배를 공고화했다”고 분석했다. 즉, 국내 보수정당은 ‘위’에서 ‘아래’로의 성장을 중시하며 성장했기에, 변화에는 능동적으로 대처한 전례가 없었다.

윤지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가 쓴 논문 ‘낙수경제의 부활: 불평등시대의 동아시아 보수정치와 그 적응’(2016)을 살펴보면 이런 분석이 있다. “복지주의(welfarism)운동이 세계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그동안 시장우위·복지축소를 주장해 온 보수정당들의 정책변화가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중략) 하지만 동아시아 보수정당의 태도는 유럽과 사뭇 다르다. 특히 수출산업을 통해 벌어들인 부가 하청·고용 등 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자연스럽게 분배될 것이며 이러한 생산-분배의 과정에 국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낙수경제(trickle-economics)의 정책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강성 보수층에 대한 대중의 염증도 보수정치가 풀어내야 할 숙제다. 정치학계에서 많이 인용되는 레토릭 중 하나가 ‘거리의 정치에서 의회 정치로’라는 뜻의 ‘프롬 바리케이드 투 발코니(From barricade to balcony)’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2019년 2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태극기부대에 취해야 할 한국당(통합당의 전신)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단절해야 한다’는 응답이 57.9%로, ‘포용해야 한다’는 응답(26.1%)의 두 배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보수정당이 중도층과 무당층을 흡수하기 위해선, 극우와의 이별이 전제되어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총선 전까지 통합당은 ‘태극기의 목소리’를 곧 민심으로 읽으려 했다. 중앙대 명예교수이기도 한 이상돈 의원(무소속)은 “서구 사회에서 보수는 지적 담론에서 진보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수는 학습보다 광장에 나가 시민들에게 외치는 일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국내 보수정당이 서구 보수정당의 사례를 교훈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영국·스웨덴·독일 등에서는 이미 보수정당이 진보적 전환(progressive turns)을 시도하고 있다. 복지 증대나 노동조합의 권리 보호 등을 천명하며 선거에 임하는 식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보수의 변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두 차례의 대선 실패, 차떼기 등 부정부패 이미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보수가 궁지에 몰렸을 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고(故)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의 ‘공동체 자유주의’다. 서울대 교수와 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 전 이사장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삼고 여기에 독일식 질서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절충시켰다. 박형준 전 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은 지난해 쓴 《보수의 재구성》에서 “공동체 자유주의는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를 뛰어넘어 한국 보수주의의 새로운 가치를 만든 시도였다”며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존중하는 시민공화주의를 보수의 새로운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성평등 등 진보진영의 가치도 공동의 선을 함께 추구하는 ‘공화(共和)’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방전은 나왔다. 그러나 이를 체화하지 못한 보수정당은 국가를 막론하고 패배를 겪고 있다. 지난 1월11일 치러진 대만 대선에서는 진보정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 결과를 두고 황신하오 중국문화대 교수는 “정체성과 주권의식이 강한 젊은 세대, 특히 첫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의 표심이 승패를 갈랐다. (보수정당인) 국민당이 청년 세대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고 분석했다.

‘품격’ 리더의 부재, ‘제2 레이건’이 필요하다

이번 총선에서 보수진영은 차기 대권주자가 대거 낙선했다. 정권 창출이 목적인 정당엔 치명상을 입은 셈이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보수진영 내부에 있다. 이상돈 의원은 “각종 이권에 개입해 이익을 본 이명박 정부 때 이미 보수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는데, 그게 한 번 더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박근혜라는 걸출한 대중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마땅한 후배 정치인을 발굴하지 못했다. 되레 2인자를 쳐내기에 급급했다. 의회권력마저 석권한 민주당은 현재 차세대 정치인이 차고 넘치는 반면, 보수는 제대로 된 후보군마저 형성돼 있지 않다.

박명호 교수는 “보수는 늘 확실한 지지층을 기반으로 한 강성 후보를 선택했다. 당내 주도권을 잡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지지는 받지 못해도 소수의 확실한 지지는 있었다”며 “그러나 탄핵 이후 판세가 (진보정당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바뀐 주류 세대에 맞게 바뀐 가치관을 보일 수 있는 새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공화당의 변신은 그래서 더욱 주목받는다. 1974년 닉슨 대통령 탄핵 이후 정권은 민주당 후보인 카터에게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공화당이 준비한 것은 차세대 정치인이다. 닉슨으로 대표되는 워싱턴 정가와 거리를 유지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인 레이건을 대선후보로 내세우면서 공화당은 1980년 대선 승리로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당시 레이건이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이는 닉슨 정권에서 주중 대사 등 외곽을 돈 조지 HW 부시였다. 레이건-부시 체제는 미·소 냉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12년 장기집권을 만들어냈다. 이상돈 의원은 “부정으로 몰락한 닉슨 이후 차별화된 품격의 레이건을 내세워 공화당이 성공한 것처럼 우리 보수도 탄핵과 거리가 먼 품격을 갖춘 지적인 이미지의 대선주자를 지금부터라도 키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안병진 교수는 “우리나라에 따뜻한 공동체 하면 생각나는 보수 리더가 있나? 없다. 따뜻한 생각을 하는 건 진보의 전유물이 된 것 같은 모습”이라며 “새로운 담론을 던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수정치인이었지만 민주당보다 부패와의 전쟁을 더 격렬하게 벌였던 미국의 고(故)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이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리더가 바뀌면 판세는 달라질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변화된 보수’를 전제로 긍정적인 답을 내놨다. 이번 총선에서 거대 양당에 대한 민심이 생각보다 큰 격차를 보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민주당과 통합당의 수도권 지역구 의석수는 103 대 16으로 큰 차이를 보였지만, 득표율 격차를 살펴보면 13%포인트에 불과했다. 격전지에서 민주당이 간발의 차이로 여러 곳에서 승리한 결과다. 민주당 내 부정적 이슈가 발생하거나, 중도층을 사로잡을 보수 리더가 부상한다면 보수정당이 회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안병진 교수는 “진보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건 착시다. (민주당이) 리버럴한 가치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대선에서 얼마든지 궤멸적 패배가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박명호 교수는 “전국 단위 지역구 득표율이나 비례대표 득표율 등을 보면 향후 5~6% 유권자만 (보수정당으로) 움직여도 결과는 뒤집어질 수 있다”며 “보수가 변신에 성공한다면 향후 대권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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