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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 Brief [행정이 정치에 항복하다: 24조원 예타 면제를 보며] 통권 84호
 
2019-01-31 16:32:04
첨부 : 190131_brief.pdf  
Hansun Brief 통권84호


박수영 한반도선진화재단 대표

 

예비타당성 조사는 재정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업의 타당성을 사전에 평가해서 세금 낭비를 막으려는 제도로,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된 것이다. 흔히 예타라는 줄임말로 불리어지는 이 제도는 특히 SOC 등 각종 건설공사에 예산낭비가 많아 이를 막으려는 정책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정치인과 지자체장들은 다리든 도로든 지역의 각종 건설 사업을 일으키고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삼아 재선을 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사례들이 예산 낭비로 이어진 과거의 경험을 바로 잡고자 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한번이라도 예타를 신청해 본 공직자들은 잘 알고 있듯이 예타를 통과하는 과정은 매우 지난하다. 아예 처음부터 퇴짜를 맞는 경우도 많고 상당히 긴 준비와 협의 시간이 지나도 결국 예타를 통과하지 못하는 사업이 부지기수다. ‘예타를 통과시키지 못한 정치인들과 지역주민들은 예타 제도 자체를 비난하지만, 객관적인 평가 결과 사업의 타당성이 없다고 결론 지어진 사업인 만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다. 어떤 경우에는 B/C1을 넘어도 당해 연도 사업으로 채택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업들의 우선순위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타당성이 있어도 예산범위 내에서 나라를 운영해야 되는 정부입장에서는 예산 제약으로 채택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타 과정이 지난하기 때문에 예비타당성 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업들은 아예 시작부터 걸러지기도 하고, ‘예타를 통과한 사업들은 그 과정에서 훨씬 더 정교해지고 준비가 탄탄해지는 장점이 있다.

 

지난 130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무려 24조원에 달하는 사업에 대해 한꺼번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제도 도입 이후 초유의 사태로, 정치권의 요구가 있으면 예산투입의 우선순위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기재부가 청와대에, 행정이 정치에 항복 선언을 한 셈이다. 이렇게 대규모 사업을 면제시켰으니 앞으로 정부부처나 지자체에 예타를 강력하게 요구하기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려, 예타 제도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한 번의 예타만 잘못되거나 예타 제도 자체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법치주의 또한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국가재정법 제38조의 규정과 입법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38조를 보면 10가지 경우에 예타를 면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법령상 의무화되어 있다든지, 안보, 재난 등 긴급한 경제 사회적 대응이 필요한 경우 등 매우 한정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대번 알 수 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지역균형발전인데 제38조의 전 취지로 보면 지역균형발전이라도 긴급한 국가적 필요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내년도 총선이라는 경제외적 요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긴급한 국가적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바로 이 조항을 빌미로 대규모 예타 면제를 추진함으로써 법치주의도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이 조항은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하여 국무회의를 거쳐 확정된 사업에 한정한다는 단서가 붙어있다. 그동안 기재부는 이 단서조항에 의거해 국무회의는 고사하고 차관회의에조차 상정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아왔는데, 이번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 제38조 제10호의 지역균형발전이란 규정이 법률에 들어갈 때만 해도, 기재부에서는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되는 만큼 기재부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반대의견을 내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튼 이번 24조원의 예타 면제를 계기로, 앞으로 정치논리가 밀고 들어오면 방어할 수 없게 되는 선례를 기재부가 용인하고 말았다. 부총리가 수장이고 예산을 가진 막강 부처인 기재부가 무너지는 것을 본 다른 모든 부처 또한 앞으로 정치의 힘에 속절없이 항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예산과정이란 늘 정치와 행정이 만나는 곳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정치와 행정의 접점이 같은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을 경우 행정의 전문성과 합리성이 우선시되는 나라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정치의 전문성, 투명성, 책임성이 그 어느 부문보다 낮은 나라에서 정치가 전문성과 합리성을 가진 행정을 압도하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규모 예타 면제가 결정된 뒤, 관련 집단의 반응은 두 가지다. 면제를 받은 사업과 관련된 정치인과 지역주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 반면, 면제를 받지 못한 사업의 정치인과 주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나타내면서 일부는 국회와 청와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두 부류 모두 대한민국이나 우리 사회보다는 자신들의 이익만 바라보는 분들이다.

 

타당성 조사 없이 나랏돈을 쓴다는데 그걸 좋아라하고, 또 거기서 탈락했다고 항의하는 것은 나랏돈 마음대로 쓰는 걸 용인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세금이 낭비된다면 분노하고 욕할 분들이 자신이 관련된 사업에서는 세금 낭비가 되어도 좋다고 하는, 말하자면 그들이 그렇게 비난하던 내로남불의 전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또 대규모 예타 면제가 국가재정법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이 관련된 지점에서는 비록 법률 위반이라도 좋아라 환영하는 모습 또한 민주시민의 자세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 정부결정은 단순히 한 번의 예비타당성 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타 제도 그 자체, 법치주의의 본질, 기획재정부라는 제1부처, 그리고 이 나라 행정 전체가 무너진 것이라 할 수 있다. 2019130일은 이 나라 행정이 정치에 항복 선언을 한 치욕스런 날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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