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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뉴스룸] 독일의 재난 안전관리에서 얻는 교훈- 정치인들, 재난현장에서 ‘쇼’ 안 해
 
2020-04-06 15:04:52

◆ 한반도선진화재단의 양돈선 독일연구포럼대표의 칼럼입니다.


⊙ 정직과 신뢰, 균형감, 완벽주의가 안전사회 만들어
⊙ 고교 졸업 시 인명구조사 자격증 취득… 집마다 응급구조키트·3개월 치 비상식량 보유
⊙ 2010년 글로리아호 화재사건 당시 국장급 해난구조대장 지휘 아래 사태 수습
⊙ 사고 時 현장책임자가 컨트롤타워
⊙ 2007년 大유행성전염병 대비 훈련 실시…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2015년 메르스 극복


독일은 재난 안전관리를 대단히 중시하는 나라다. 독일에서 신뢰받는 직업 종사자의 순위를 보면 소방관, 구급대원, 간호사, 약사, 의사 순이다. 그만큼 재난안전, 질병관리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위해 일하는 직업군(職業群)이 존경을 받고 있다. 이들 역시 소명(召命)의식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러한 안전중시 관행은 역사적 산물이다. 독일에서는 중세(中世) 이후 길드와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산업재해가 늘어나고 위험사회가 되었다. 게다가 제1·2차 세계대전, 국토 분단, 냉전(冷戰) 등 불확실성을 경험하면서 안전을 사회를 유지하는 준거(準據)로 여기게 됐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Ulrich Beck)는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가공할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역설했다.
 
 
  정직이 지배하는 사회
 
  독일은 산업화 과정에서 위험 요인을 슬기롭게 넘겼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敗戰) 후 압축성장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던 시절에도 물질만능주의·배금주의(拜金主義)에 빠지지 않고, 위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성숙한 사회로 발전하였다. 안전중시 문화도 이에 비례하여 발전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독일은 정직이 지배하는 사회다.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건축물 건설 시 안전에 절대 필요한 철근이나 콘크리트 정량을 속이고 빼돌리거나, 부실 자재 사용, 불법 증축, 용도 설계 불법 변경, 안전진단 축소 생략, 공사비 유출, 감독기관 유착 비리 등의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다. 식품에 유해(有害) 첨가물을 섞는 행위, 주유소에서 휘발유 정량을 속이는 행위 등은 거의 없다. 그러니 대형 붕괴사고 발생의 개연성이 그만큼 적어지게 된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지은 집을 헌 집(altes Haus), 후에 지은 집을 새집(neues Haus)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니 지은 지 70여 년이 된 집도 새집에 해당한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고옥(古屋)에 해당될 법한데도, 대부분 골조, 대문, 히터, 상하수도 배관시설 등이 무척 튼튼하다.
 
  필자가 1980년대 후반 본(Bonn)대학 유학 시절 살던 3층짜리 연립주택도 1950년경에 지은 것이었다. 필자가 살던 때에 이미 40여 년이 흐른 상태였는데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2015년 방문하였을 때 보니 현관 대문만 목재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꾼 것 외에는 옛날 소재 그대로였다. 고급 주택이 아닌 서민주택인데도 그렇다.
 
  독일의 건축물, 구축물(도로?교량?운하 등)은 반(半)영구적이다. 수백 년 된 구축물이 수두룩하다. 필자가 독일의 건물 붕괴 사례를 문헌에서 조사해보니, 2009년 3월 쾰른시청 문서보관소 붕괴가 유일하였다. 정직의 대가(對價)다.
 
 
  신뢰·균형 사회
 
  둘째, 독일은 신뢰사회다. 독일도 역시 2008년 광우병(狂牛病),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었다. 하지만 큰 소동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광우병 발생 며칠 만에 정부가 “광우병은 문제가 없다”고 하자, 국민들은 그대로 믿고 정부의 조치를 따른 것이다. 독일 정부와 정치인들은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다. 국민들은 ‘재난 발생 시 국가가 국민들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그동안 정치인의 정직성과 정부의 위기해결 능력 때문에 생긴 학습 효과다.
 
  이러한 사회적 신뢰 덕분에 국가 위기가 닥쳐도 안전 위험의 객관적 사실이 불필요하게 확대되거나 왜곡 증폭되어 그 자체가 더 큰 사회적 위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 따라서 사회적 혼란이나 공포감이 조성되지 않는다. 국론(國論) 분열도 일어나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안전 의식이 너무 지나치다는 의견도 나온다. 독일은 완벽주의를 추구하다 보니, 모험이나 불확실한 일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정부 정책, 기업 경영은 능동적·공격적이지 못하고 보수적이다. 그래서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만큼 안전에 대한 갈구와 신뢰가 강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셋째, 독일은 균형사회다. 독일 국민은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理性的)인 성향이 강하고, 집단 메모리 용량도 매우 크다. 웬만한 사건에는 사회가 흔들리지 않는다. 일이 터질 때마다 마치 처음 겪는 일처럼 허둥대고 ‘안전 불감증’ ‘땜질 처방’ ‘국가 개조’ 운운하면서 온 나라가 냄비처럼 들끓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망각병 DNA가 아니다. 냉정하게 사고 원인을 분석하고 재발 방지에 노력을 집중한다.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라는 브랜드의 명성은 가격 경쟁력이 아닌 품질 경쟁력에서 나온다. 저가(低價) 상품 전략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는 안전 분야도 마찬가지다. 독일 국민은 값싼 안전 서비스보다는, 값을 더 주더라도 질(質) 높은 서비스를 원한다. 저비용·운임은 부실공사, 정원 초과, 과속(過速), 과적(過積) 등을 유발시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언론도 매우 객관적이고 공정하다. 특정 정권에 편향된 뉴스나 ‘뇌구멍 숭숭…’ 같은 가짜 뉴스를 생산하지 않는다. 여기에 유언비어나 괴담(怪談), 정치적 음모가 헤집고 들어올 공간은 없다. 이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시장경제의 역동성(力動性)을 유지시켜, 국가 신뢰를 지키는 선순환(善循環)으로 이어진다.
 
 
  완벽주의
 

2015년 11월 6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에서 발생한 열차와 트럭 충돌사고 현장. 사진=뉴시스/AP

  재난 사고, 특히 대홍수나 대지진(大地震), 해일(海溢), 태풍, 대정전(大停電), 전염병, 핵(核)폭발, 국제 테러 등 이른바 X-이벤트(Extreme Event)는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한번 발생하면 가공(可恐)의 피해를 낳는다. 독일에도 이러한 자연재난은 물론 화재, 교통사고, 선박 침몰 등의 인재(人災) 사고가 가끔 발생한다. 독일은 재난 안전사고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철저한 사전(事前) 대비다. 재난 안전사고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현실화되지 않은 불확실한 미지(未知)의 위험이다. 미리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축적된 지식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일도 결국은 과거의 일이 되고, 경험과 지식의 영역으로 바뀐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그 나라 그 사회의 역량에 달렸다.
 
  여기에서 독일인들의 완벽주의가 드러난다.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독일인들은 돌발성 대재앙(大災殃)에 대해 ‘사전 대비가 최선의 방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거 사고의 실패에서 경험을 얻어 이를 지식으로 축적한다. 여기에 과학을 더하여 미래 위험의 재발 방지를 위한 지혜를 찾아내 철저한 계획을 만들어낸다. ‘비상계획’의 ‘비상계획’ ‘플랜 B’는 물론 ‘플랜 C’까지도 세워둔다.
 
  1998년 6월 독일 에세데(Eschede) 지역에서 고속열차(ICE) 탈선사고가 발생하여 101명이 사망하고 88명이 중상(重傷)을 입었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건국 이후 최악의 대형 인재(人災) 사고였다. 기술의 상징이던 독일의 체면이 많이 상했다. 독일은 이 사고를 계기로 차량 기기를 전면 교체하고 철도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10년 후인 2008년 4월 란트뤼켄(Landruecken)에서 열차사고가 났다. 사망자는 없었다. 135명이 구조되었다. 피해는 경상(輕傷) 19명에 그쳤다. 그 10년 후인 2018년 10월 몬타바우어(Montabaur)에서 열차 화재사고가 발생하였다. 객차 2량이 전소(全燒)하고 나머지 차량도 파손되었지만, 승객 510명 전원은 무사하였다.
 
 
  안전교육 생활화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을 가르치는데, 김나지움(고등학교) 졸업 시 인명구조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사진=조선DB

  둘째, 안전교육을 생활화하고 있다. 안전 의식은 유치원에서부터 길러진다. 교통안전 교육을 공교육 교과과정에 편입하여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까지 지속한다. 불시에 긴급 소방재난 훈련도 실시하여 대처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전 국민이 16세에서 65세까지 10시간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때 미사일이나 핵 공격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숙지하게 된다. 운전면허 교습 시에도 심폐소생술, 교통사고 대처 등 응급조치 교육을 의무적으로 4시간 받아야 한다.
 
  독일 국민들은 거의 다 수영을 잘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다 배우기 때문이다. 3학년이 되면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여 8~9학년(김나지움 4~5학년)까지 계속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심폐소생술과 인명구조 훈련을 배우고 인명구조 자격증까지 받게 된다. 결국 모든 학생이 인명구조 요원이 되어 졸업하는 셈이다.
 
  셋째, 독일은 법과 원칙의 사회다. 준법(遵法)정신이 매우 강하다. 국민들은 상위 법령은 물론 하위 안전수칙(매뉴얼)도 철저히 준수한다. 정원 초과, 과속, 과적, 공회전 등에 대한 금지 사항을 그대로 따른다. 매뉴얼과 현장이 따로 놀지 않는다. ‘있으나 마나 한’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매뉴얼은 없다.
 
  독일의 각 가정에는 평소 마스크, 장갑, 체온계, 상비약 등이 담긴 ‘응급 구조키트’를 구비하고 있다. 지하 창고에는 최소한 3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집이나 사무실에서 반경 100m 이내에 대피 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인구 5만명 이상의 도시에서 건물을 신축할 때에는 지하에 대피소를 마련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각 대피소에는 11일간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과 물, 환기장치,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다. 이는 방사능 물질, 화재, 파편, 미사일, 핵, 생화학 공격 등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위와 같은 평소의 안전교육과 사전 대비, 준법정신을 통해서 교통사고, 수재(水災), 선박 침몰, 전염병 발병, 전쟁 등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우선 급한 대로 응급 대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앰뷸런스, 소방대, 해난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골든타임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독일은 1990년 10월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사실상의 주적(主敵)이 사라졌다. 지금은 냉전 시대도 아니다. 러시아의 위협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당장 전시(戰時) 상태도 아니다. 더욱이 독일은 세계평화지수 1위의 평화국가다. 그럼에도 안전과 안보는 철저히 지키고 있다.
 
 
  현장 중심 시스템
 
  독일에서 재난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건 대응 처리는 놀랄 만큼 신속하고 피해 규모도 비교적 적다. 앰뷸런스가 교통사고 접수 후 현장에 출동하여 응급조치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10분 이내에 불과하다. 전체 교통사고의 95%가 20분 이내에 응급조치가 마무리된다. 2010년 10월 ‘독일판 세월호 사건’의 경우, 해난구조대가 사건 접수 후 작전 개시까지 소요된 시간이 20분에 불과하였다.
 
  1998년 독일 북부 도시 브레멘(Bremen)의 인근 해역에서 파나마 선적(船籍)의 화물선이 침몰, 약 90톤의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독일은 교통부 산하에 ‘하바리 코만도(Havarie Kommando)’라는 해난구조대를 창설, 해양선박 사고 처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12년 후인 2010년 10월에 ‘독일판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밤 12시에 독일과 덴마크 공해(公海)상에서 덴마크 선적의 여객선 ‘글로리아호’ 갑판에서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선박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 이때 ‘하바리 코만도’가 즉각 출동하여 승객과 선원 236명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그 후에도 60여 건 이상의 해양선박 사고를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독일에서는 어떻게 위와 같은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가?
 
  먼저, 재난 대응기관별로 재난 처리 기능이 효율적으로 분장되어 있다. 1차적 재난관리, 예컨대 일상적 재난관리, 화재 진압, 응급 구조 등은 기초 지방자치단체(우리의 시·군)가 관장한다. 그다음 기초 지자체 능력을 초과하는 2차적 재난 안전관리, 관련 법령 입법, 계획 수립·집행 등은 주(州)정부(우리의 道)가 관할한다.
 
  연방정부는 평소 재난 안전관리 입법·제도를 총괄하고, 주정부나 지자체의 재난 처리 시 인적·물적 지원을 한다. 그리고 국제 테러·전염병·대홍수 등 전국적 대형 재난, 국제 재난, 전시(戰時) 시민 보호와 같은 범(汎)국가적 재난에 주력한다.
 
  둘째, 사고 대응 지휘 체계가 현장 중심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재난 안전사고 처리는 고도의 전문성과 기민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사건처리대책본부(control tower)의 수장(首長)은 사건 내용과 대응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현장 책임자가 맡는다. 예컨대 소방서장·경찰서장·해난구조대장이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소관 사건을 지휘한다. 책임자의 지위 고하(高下) 여부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정당한 권한을 부여받은 책임자의 명령과 지시가 곧 법이다. 여기에 정치가 정무적 판단으로 개입할 여지는 없다. 해난구조대장은 교통부 외청(外廳)의 국장급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독일판 세월호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해냈다.
 
 
  재난 현장에 정치인은 없다
 

지난 1월 28일 코로나 대책 점검차 중앙의료원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독일에서는 재난 시 정치인들이 현장에 나타나는 ‘쇼’를 하지 않는다. 사진=뉴시스

  정치인들은 재난 현장에 출현을 자제한다. 불시에 재난 현장에 나타나서 사고 수습에 정신이 없는 책임자 붙들고 현황 보고받거나, 불필요한 개입으로 수습에 혼선을 빚거나, 사진이나 찍어 홍보하는 포퓰리즘은 찾아볼 수 없다.
 
  대형 사고의 경우, 연방총리나 소관 장관이 검은 예복을 입고 나와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일이 있지만,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총리나 장관이 탄탄한 사회적 안전망과 사고 처리 전문가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장 중심 시스템 때문에 연방총리나 장관은 상당 부분 사고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러니 정쟁(政爭)의 소재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세월호 7시간 동안 대통령이 뭘 했느냐?” “장관은 왜 나타나지 않나?” 같은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일 일도 없고, 그만큼 국론 분열의 가능성도 적다.
 
  사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의 경우, 가정(假定)이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문제의 7시간 동안 전면에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국가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훼손이나 국론 분열은 덜 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총체적으로 부실한 안전 시스템이 대통령의 몇 마디 말로 갑자기 작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안전사고 대응기관들의 반복 훈련이다. 독일의 재난 안전사고 처리를 전담하는 단원·대원들은 평소 세뇌 수준의 엄청난 교육 훈련을 받는다. 안전사고 특성상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와 경우의 수에 신속히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훈련만이 재난 전문가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해난구조대 대원들은 평소 특공대 수준의 훈련을 한다. 평소에 실전(實戰) 같은 훈련을 연 160회 정도 반복 실시한다.
 
  또 이 훈련기관들은 훈련마다 그 훈련 결과를 분석하여 문제점을 다음 훈련에 개선·반영하는 환류(feedback) 절차를 거친다. 이를 통해 학습 효과를 얻고 노하우를 축적하여 대응 능력 수준을 높여나간다.
 
  이러한 반복된 고도의 훈련 덕분에, 어떠한 위기 상황이 닥쳐도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신속 유연하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처리할 수 있다. 사고 처리 과정이 아주 조용하고 사회 분위기도 차분하지만, 사건 대응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니 대형 사고로 번지는 경우가 드물다.
 
 
  2007년 大유행성 전염병 대비 훈련 실시
 
  대형 재난사고로 인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부 재난 대응기관의 힘만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가 없다. 연방정부, 주정부, 재난 대응기관, 국민 등 나라 전체가 합심하여 조직적·유기적으로 막아내야 한다.
 
  독일은 2001년 미국 뉴욕의 9·11테러, 2002년 독일 엘베강 대홍수 등을 계기로 범정부 차원의 〈국민보호 신(新)전략(NSSB)〉이라는 국가위기 관리 종합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연방 내무부 산하에 ‘국민보호재난지원청(BBK)’을 설립하여 국가위기 관리를 총괄하고 있다.
 
  독일은 이 종합전략이 사고 현장에서 잘 작동될 수 있도록 평소 종합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를 범정부적 ‘국가위기 관리 훈련(LUEKEX?Laender-uebergreifende Krisenmanagement Exercise)’이라고 한다.
 
  이 훈련은 2004년부터 시작하여 2~3년 주기로 실시하고 있는데, 연방정부, 일부 주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순환 교체 방식으로 참여한다. 여기에 공항, 재난 구조기관, 전력회사, 에너지 기업, 안전협회 등 안전 유관기관들이 공동 참여한다. 훈련할 때마다 훈련 주제를 바꿔가면서 실시한다.
 
  2007년도에 실시한 ‘LUEKEX 2007’ 사례를 통해 ‘국가위기 관리 훈련’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이 훈련은 대(大)유행성 전염병 발병 상황을 상정한 것이었다.
 



〈LUEKEX 2007 개요〉




  ⅰ)훈련기관: 11개 연방정부 부처, 7개 주정부, 50여 개 기업, 구조단체, 협회 등 3000여 명
 
  ⅱ)훈련 시나리오: 대유행성 전염병(pandemic) 발병, 국민 33%가 감염 ⇒ 10만명 사망, 40만명 입원, 노동력 50% 소실, 교통·통신 마비
  ㅇ 1차 전염병: 독일과 유럽에서 발생하여 세계적인 위기로 확산됨
  정부는 공공/민간 보건기구를 최대한 가동하기로 결정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위기관리 수준을 격상함
  ㅇ 2차 전염병: 아시아에 미치고 서쪽으로 확산. 1차 전염병의 후속 간호조치 및 추가 예방조치 실시. 긴밀한 국제협력 시행
 
  ⅲ)평가 및 환류(feedback)
  ㅇ 훈련기관 간의 네트워크 조성은 긍정적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됨
  ㅇ 제기된 문제점: 대유행성 전염병에 대한 지식 결여. 의료진의 책임과 의무가 법적으로 불확실함. 의약품 생산 공급 시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지 시험이 불충분함. 보건 분야에 대한 학문적 연구 필요성 등이 제기됨
  ㅇ 비(非)보건 분야 지적사항: 교통·물류에 있어 운전사, 기관사, 조종사 등의 인력이 부족하였음. 이는 다른 분야, 즉 기초 식량, 생필품 공급, 의약품 등 조달의 애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 정부와 민간 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확인되었음
  ㅇ 이러한 문제점을 분석·보완, 다음 훈련에 반영할 예정임

 
  이 ‘국가위기 관리 훈련’은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일의 독창적 ‘국가재난 관리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은 이와 같은 위기 대응 덕분에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2015년 메르스 같은 대유행성 전염병을 막아냈다.
 
  독일은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19 전염병에도 잘 대처하고 있다. 이 전염병이 중국 우한(武漢)에서 발병하자마자 독일 정부는 즉각 군용기를 중국에 급파하여 자국민 환자들을 귀국시켜 격리했다. 이와 함께 최고 수준의 중국 여행 경고, 박람회 등 대형 행사 취소, 외부 출입 자제 등의 조치를 취했다. 지난 3월 13일 현재 확진 환자가 총 2000여 명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사망자는 5명에 불과하다. 확진자 1만5000여 명, 사망자가 1000여 명에 이르는 인근 국가 이탈리아와 크게 비교된다. 독일은 위기에 강한 나라다.
 


 
  500여 년 만의 대홍수 극복
 
  2002년 8월, 집중호우로 독일의 주요 강이 범람했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 후 10여 년 만에 맞는 대홍수였다. 특히 옛 동독 지역을 지나는 엘베강은 100여 년 만의 대홍수였다. 동부 도시 드레스덴(Dresden)에서는 21명이 숨지고 4만여 명의 이재민(罹災民)이 발생했다. 재산 피해액만 11조원에 달했다. 통일 후 대규모 통일비용을 들여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확충했는데도 피해는 엄청났다. 그래도 100여 년 만의 대형 사고 치고는 손실을 줄였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독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또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철저한 사전 대비를 했다. 제방을 두껍게 하고 강의 생태계를 자연화(自然化)하여 유속(流速)을 느리게 하였다.
 
  하늘이 독일의 재난관리 실력을 시험하려고 한 것일까? 2013년 6월 또 다른 대홍수가 독일과 중부 유럽을 강타했다. 10여 년 전에 겪은 100년 만의 대홍수보다 훨씬 강력했다. 엘베강, 도나우강, 볼타강이 범람하여 독일 남동부와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동구권이 온통 물에 잠겼다.
 
  수마(水磨)는 한 달간이나 독일 국토를 유린했다. 드레스덴 7m, 파사우(Passau) 지역은 13m까지 치솟았다. 강수량이 400mm까지 올라갔다. 독일 역사상 가장 큰 홍수로 1501년의 대홍수를 능가하는 500여 년 만의 대홍수였다.
 
  독일은 사상 처음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난 대응에 총력을 기울였다. 시민 대피, 유류(油類) 오염 방지, 식수 확보, 댐 강화 보호벽(모래주머니) 구축 등의 모든 조치를 시행했다. 첫 주에만 소방대 7만5000명, 군 병력 2만명이 투입되었다. 재산 피해는 67억 유로(약 10조원)에 이르렀지만, 인명 피해는 8명에 불과했다. 이 역시 독일 재난관리시스템이 거둔 승리였다.
 
 
  ‘보통’이 지배하는 나라
 
  독일은 ‘보통’이 지배하는 국가다. 특별대책, 특별조치법, 특별검사, 특별위원회, 특별시 등 ‘특별’이란 것이 없다. ‘특별’이 붙어야 겨우 약발이 받는 저(低)신뢰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 ‘보통’이 세계 최고의 브랜드파워 국가 독일의 국격(國格)을 지키고 있다.
 
  독일의 막강한 위기관리 능력도 일상의 ‘보통’에서 나온다. ▲높은 안전 의식 ▲철저한 사전 대비 ▲현장 중심 대응 ▲반복 훈련. 이것이 전부다. 여기에 특별한 비밀은 없다. 우리도 다 아는 것이다. 다만, 독일이 우리와 다른 점은, 독일은 이를 실천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왜 ‘실천’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가? 안전 문제는 안전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운임 규제 ▲이를 만회하기 위한 사업주의 정원 초과, 과속·과적 ▲정부와 재난 대응기관들의 무능 ▲국민들의 안전 불감증 등 우리 사회 전체의 복합적 문제가 결합하여 나타난 집약체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침몰 등 대형 사건이 안전 법규나 대응기관이 없어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현재도 각종 법규와 매뉴얼이 5000여 개에 이르고 있고, 사고 대책·처리 기구도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대형 사고는 메뉴를 달리 하여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아무리 재난 특별대책을 만들고, 안전 기구를 확대하고, 매뉴얼을 이리저리 뜯어 고쳐봐야 재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또 단순히 경제가 성장하고 세월이 흐르면 그에 비례하여 안전관리 능력이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이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비정상 요금 체계를 시장경제에 맡겨 정상화하고 ▲정치인의 지혜의 리더십 ▲사회 전반의 정직과 신뢰, 법치 ▲국민들의 성숙한 안전 의식 등 소프트파워의 향상이 있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다른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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