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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빨래비누와 고무신, 그리고 2019년 12월
 
2019-12-30 11:07:34

◆ 한반도선진화재단의 후원회원이신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건설경제 칼럼입니다.


대학 4학년 때 징병검사를 받았습니다. “3을종 합격” 복창을 했는데, 당시 병역자원이 많아서 입대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졸업을 하고 임시직이지만 23살 나이에 건설현장의 보조감독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달 뒤 시공회사 현장소장님이 저에게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당시 현장감독관에게 촌지(寸志)를 주는 관행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딱 그런 상황에 봉착한 겁니다. 그 분은 공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시공회사에 입사하여 바로 현장소장으로 부임하셨고, 저와 동갑내기 아들을 두셨습니다. 정색을 하고 “소장님, 저를 아들처럼 생각하시고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그 분은 당황하면서 봉투를 도로 집어넣으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주감독관이 저를 불렀습니다. “자네 현장에서 뭐 봐준거 있나? 봐준거 없으면 받아” 하면서 어제 그 봉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는 받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달부터는 소장님에게 안 받는다는 소리를 못하게 된 거죠. 


부조리에 익숙해지면서 나타난 문제는 제 씀씀이가 바뀐 것이었습니다. 월급만으로 생활할 때는 퇴근길에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에 만족했지만, 공돈으로 인해 호프집에 드나들게 된 겁니다. 포장마차는 외상이 없지만 호프집은 적은 돈 정도는 외상도 가능했습니다. 몇 달 지나 추석이 다가오자 외상 갚을 생각에 촌지가 기다려지더군요. 머리를 스쳐가는 그런 생각에 제 스스로가 놀랐습니다. 어느 새 촌지를 받아서 사는 인생이 된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 듯 이성이 망가지는 경험을 너무 빨리 한 겁니다. 훗날 제가 건설회사 임원이 되어 신입사원 특강을 할 때 저의 이 경험을 얘기해 주곤 했습니다. 


길을 가다 보면 교차로에 지역 국회의원이 걸어놓은 현수막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예산을 많이 끌어오는 힘이 있음을 지역 유권자들에게 과시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국회의원은 나라살림을 챙기라고 뽑아준 지역 대표이지, 구청장 노릇하라고 국회로 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권자들은 잊으면 안됩니다. 앞으로 이런 홍보물은 걸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유권자들은 그 정치인이 입법활동을 공약대로 실천하는가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가 일천한 우리나라는 과거 선거에서 수많은 비리와 부도덕한 행태의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제헌국회 선거 때에는 주민들이 입후보자들에게 나랏일 잘하라고 현수막용 광목을 갖다 주기도 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정치인들의 득표 행위는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어느 신문기사처럼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치’ 대신, 유권자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950~60년대 물자가 귀하던 시대에는 검정고무신과 빨래비누를 돌렸습니다. 이후 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유권자들의 표를 사기 위한 선물은 점점 고가화·고급화하였고, 급기야는 흔적이 잘 남지 않는 현금봉투가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그런 어리숙한 행태가 아니라 더 진화된 방법으로 표를 유인합니다. 



정부가 올해 역대 최대인 7조원이 넘는 실업급여 예산을 배정하고도 모자라 7900억여원을 더 충당했다고 합니다. 청년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는 중소기업에 1인당 최대 2700만원을 지원하는 청년추가고용 장려금에 이어 '현금 복지 사업'에 쓰는 돈입니다. 그런데 중소기업에 청년고용장려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결국 그 중소기업이 경쟁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고용조건이나 임금수준은 이제 경쟁력을 많이 잃었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불로세금주도성장이 아니라 당당한 노동소득에 의한 선순환 성장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의 바람은 남에게 손 벌리거나 간섭받지 않고 내가 벌어 우리 식구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사는 소박한 것입니다. 정부는 큰 울타리만 튼튼히 쳐주면 됩니다. 지금 정부는 국민이 놀랄까 봐 민방위훈련을 줄이고, 불안해할까 봐 경제상황도 괜찮다고 하고 있습니다. 국민에게 불안을 조장해서 억압하는 정부는 나쁜 정부라는 거지요.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이 착한 정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이상도 좋지만 현실은 엄중합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즉 하늘의 별만 보다 구덩이에 빠지는 우를 범하면 안됩니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 스탈린의 딸이 한 말입니다. 


부패는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파괴적 행위를 말하고, 퇴폐는 무엇이 좋고 나쁜가를 모르고 저지르는 도덕적 타락이나 비윤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말합니다. 동남아 어느 나라 출장 길에 그 나라 젊은이들과 저녁모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옷도 잘 입었지만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도 잘하고 똑똑하게 생겼더군요. 대부분 고위공직자의 자녀들로서 해외원조를 관리하는 공직에 앉아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상당한 원조물자들이 가난한 국민들에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하더군요. 저는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봤습니다. 


가진 것 많은 부모를 둔 사람을 ‘금수저’라 부른다는데, 일 안하고 국가가 주는 돈으로 사는 젊은이도 금수저에 속하지 않을까요. 요즈음 젊은이들 중에는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별의별 꼼수를 다 동원한다 합니다. 물질적 가난은 극복되지만 정신의 타락은 마약처럼 끊기 어렵습니다. 이번 대학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의 ‘no pain no gain’ 철학이 진짜 건강한 삶의 철학입니다. 이 학생 덕분에 오랜만에 우리 사회가 희망과 용기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젊은이들은 지원금을 정부에 돌려주고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을 펴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새해 덕담 삼아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전해주고 싶습니다. “자네 삶은 자네가 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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