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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단계적 비핵화는 核보유와 같은 말… ‘실패의 추억’만 또 쌓을뿐
 
2019-09-25 10:22:52

◆ 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담당대사는 한반도선진화재단 대외정책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韓·美정상회담 계기로 본 北核협상 

과거 북핵위기 통해 ‘부분적 핵감축 = 위장 비핵화’ 확인… 트럼프, 재선 앞두고 ‘단계 해결’ 선호할 수도  

제재 조치는 현재로선 유일한 대북 압박수단… 완전 비핵화 이전 해제하면 ‘군사 옵션’다시 부를 우려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와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23일(현지시간)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의제는 북핵 등 북한 관련 문제들이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영역에서 사라졌던 북핵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약 2주일 전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전격 경질한 데 이어 북한 비핵화의 ‘새로운 방법’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북핵 문제에 관한 미국의 기존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주목된다. 북한은 지난 수개월 간 미국의 북핵 실무 협상 제안에 불응하고 미 정부 정책 당국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미국이 핵 협상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들고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만큼 앞으로 이뤄질 미·북 간 북핵 협상의 향배에 관심이 쏠린다. 

◇대선 환경에 쫓긴 트럼프의 북핵 협상 전략 변화 기미

오랫동안 미국과 북한의 북핵 협상 전략은 ‘일괄타결’과 ‘단계적 해결’이라는 상호 배치되는 프레임으로 함축돼 왔다. 북한과의 핵 협상에 임하는 미국의 목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모든 핵시설과 핵물질의 일괄적 폐기 합의와 그에 따른 즉각적인 리스트 신고·검증, 핵 폐기 이행을 포함하는 ‘일괄타결’ 방식의 핵 합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합의를 모두 이행해 비핵화가 달성될 때까지는 대북 제재를 해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핵 동결을 토대로 단계적 비핵화에 합의했던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 합의’ 등의 실패 사례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북한은 핵을 보유한 채 제재에서 벗어나는 파키스탄 모델을 지향한다. 북의 목표는 핵무장을 기정사실화 해서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부분적 비핵화로 현재 북한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국제사회의 제재들을 해제하는 것이다. 합의 초기 단계에서 핵 능력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가로 제재 조치 대부분을 해제하려는 이른바 ‘단계적 비핵화’ 합의인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 하노이 제2차 미·북 정상회담 당시 영변 핵시설 폐기 대가로 유엔 제재 조치 대부분을 해제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하노이 핵 담판은 결렬됐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국내 정치 환경이다. 대통령 재선 도전을 앞둔 그가 국내정치용으로 북핵 문제의 가시적 진전을 연출하기 위해, 슬그머니 북한의 ‘단계적 해결’ 방식에 호응할 가능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최근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퇴진은 그런 우려를 짐작하게 한다. 문재인 정부 역시 2017년 제3차 북핵 위기 발생 이래 중국·러시아와 더불어 북핵 문제의 단계적 해결방식을 사실상 지지해 왔고, 지난해에는 유럽 국가들에 대해 대북한 제재의 해제를 교섭하기까지 했다.

◇부분 핵 감축은 위장 비핵화…뼈아픈 ‘실패의 추억’만 불러

일단 핵 동결을 실시한 후 단계적 협상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점진적으로 이뤄간다는 협상 개념은 얼핏 듣기에 합리적이고 무난한 방식으로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과 국제사회는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때도, 2003년 제2차 북핵 위기 때도 북한과 단계적 비핵화 방식의 합의를 했다.  

그러나 북한은 핵 동결 등 초기 단계의 사소한 합의 이행 대가로 반대급부를 챙기고는 결정적 비핵화 조치가 요구되는 시점이 되면 어김없이 합의를 파기하고 원점으로 복귀했다. 결국 수많은 비핵화 합의는 비핵화의 문턱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파기됐고, 결과적으로 북에 핵 개발을 완성할 시간만 벌어주는 결과를 초래한 뼈아픈 ‘실패의 추억’을 남겼다. 북이 ‘단계적 비핵화’를 고집한다는 것은 완전한 비핵화를 이행할 최종단계까지 갈 의사가 없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즉 북의 단계적 비핵화 주장은 핵 보유론과 동의어다. 

북한이 하노이 회담에서 단계적 비핵화의 첫 단계로 내놓은 협상 패키지 역시 전체 핵시설의 일부에 불과한 영변 핵시설 폐기 대가로 제재 조치 대부분을 해제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핵시설 리스트 제출·신고와 검증 절차를 거부한 채 ‘영변과 제재의 맞바꾸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안보 당국자들은 북한 전체 핵시설에서 차지하는 영변 핵시설 비중이 70%가량 되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실제로는 기껏해야 20∼30%라는 게 정설이다. 그중 영변 핵시설의 대표 격인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은 용도 폐기가 임박한 거대한 고철 더미일 뿐이다. 더욱이 영변 핵시설에서 이미 생산된 수백 ㎏의 농축우라늄은 폐기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북의 이런 ‘부분적 핵 감축’은 완전한 비핵화와는 크게 동떨어진 ‘위장 비핵화’에 불과하다. 북한이 이미 일반 핵무기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수소탄 개발에 성공한 상황에서 일부 핵시설의 양적 감축의 의미는 크지 않다. 핵 감축의 대가로 미국이 유일한 대북 압박수단인 제재 카드를 소진한다면 그건 외교적 자폭행위와도 같다.

◇대북 제재, 비핵화 압박하면서 미 군사 옵션도 견제…섣부른 해제 안 돼

북이 그나마도 현재 미국과의 핵 협상에 응하는 거의 유일한 이유는 유엔의 제재 조치 해제를 노렸기 때문인데 북한 핵 능력의 일부에 불과한 영변 핵시설 해체의 대가로 제재 조치를 전면 해제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예상컨대 이후 북한은 다시는 핵 협상에 나오지 않고 잔여 핵시설과 핵무기들을 보유한 채 핵보유국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대북 군사적 압박을 유보한 이후에는 줄곧 외교적·비군사적 압박 수단만을 써왔다. 이는 대북 제재 조치가 그만큼 강력한 효과를 확인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재 조치의 효과가 없었다면 미국이 군사적 압박 카드를 그리 쉽게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제재 조치의 존재는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는 동시에 미국의 군사적 옵션 선택을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수다. 이는 완전한 비핵화 없는 제재 조치 해제로 북한이 재차 합의를 파기하고 노골적 핵 개발을 계속하게 된다면 미국이 마지막 압박수단으로 군사적 수단을 꺼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섣부른 대북 제재 해제는 군사 옵션을 다시 불러오는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현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졸속 변경할 가능성이 우려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극도의 이상 징후를 보이는 한·미 관계다. 한국 정부의 거듭되는 반(反)동맹적 행위에 대한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미국 내 친한파가 줄고 있다는 관측이 많다. 앞으로 미국이 대북 정책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고자 할 때 한국의 안보적 이해를 얼마나 배려해 줄 것인지는 의문이다. 미국이 필요에 따라 대북 유화정책을 선택하든 초강경 선회를 선택하든 한국 정부에 사전 통보하거나 협의하는 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동맹외교를 경제논리 위주로 재단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와 국가안보를 대북정책에 예속화하려는 문재인 정부 간 마찰이 부를 수도 있는 불행한 사태다. 전 외교부 차관보·북핵담당대사 

■ 세줄 요약 

트럼프의 북핵 전략 변화 기미 : 미국, 제네바합의와 ‘9·19합의’ 등 역사적 실패 이후 기본적으로는 일괄타결식 북핵 해법 추구.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재선 앞두고 북핵 진전 연출 위한 ‘단계적 해결’ 선호 가능성 있고 문재인 정부도 이 방안을 선호.

북 단계적 비핵화에 담긴 논리 : 단계적 비핵화는 1차, 2차 북핵 위기 경험 속에서 ‘실패의 추억’ 가져다줘. 단계적 비핵화론은 핵 보유론과 동의어. 북한의 ‘부분적 핵 감축’은 ‘위장 비핵화’이며, 핵 감축 대가로 대북 제재를 해제하면 이는 외교적 자폭행위임.

완전한 비핵화까지 제재 필요 : 대북 제재는 북한에 비핵화를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군사적 옵션을 견제하는 일석이조. 완전한 비핵화 이전의 섣부른 제재 해제는 군사 옵션을 다시 부를 수도. 한국의 반(反)동맹적 행위는 결코 국익에 도움 안 될 것. 


■ 용어 해설

파키스탄 모델 : ‘파키스탄 모델’은 핵무기 개발 이후 국내외 정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며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리비아 모델’은 핵을 스스로 폐기한 후 국제사회로부터 여러 혜택과 보상을 선물처럼 받는 형식이다. ‘남아공 모델’은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정권이 바뀌면서 핵무기를 스스로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는 모델이다. ‘이스라엘 모델’은 핵무기 보유와 관련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지만 ‘평판 쌓기’로 국제사회가 핵무기 보유를 믿게 하는 것. 

군사 옵션 : 전쟁, 물리적 타격 등을 동반하는 군사행동 수단. 선전포고에 따른 ‘전쟁’, 적의 공격이 임박한 증거를 기초로 시작하는 ‘선제타격’, 상대국의 고강도 도발이 임박하지 않았더라도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예방타격’ 등이 있다. 적국의 상징적 시설 한두 곳을 정밀 폭격함으로써 군사행동의 의지와 능력을 확인하려는 ‘코피작전’도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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