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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행정이 무너지고 있다
 
2019-04-01 15:26:21

◆ 박수영 한반도선진화재단 대표는 현재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어느 정권 어느 부처에나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정치인)과 `늘공`(늘 공직자였던 직업공무원) 간 긴장관계는 항상 존재해 왔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나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그랬으며,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문재인 정권도 신재민 사무관이나 김태우 수사관 사례에서 보듯 어공과 늘공 간 긴장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어공은 `정무적` 판단을 하는 집단이다.

늘공은 `전문적` 판단을 내세운다. 어공의 정무적 판단이란 원래 관료적 시야의 한계를 넘어 국가의 큰 그림을 그리고 국민 전체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당면한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의미로 변했다. 한편 늘공의 전문적 판단이란, 오랜 세월 한 분야에 종사한 직업공무원들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한 판단을 의미한다. 어공과 늘공의 긴장관계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전문적이고 장기적인 국익을 추구하는 늘공의 판단이 무조건 앞서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때로는 비전문적이고 단기적인 대책이 필요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당장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는 장기적 국익을 추구하는 정책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분들에게는 먼 미래에 나라가 잘되기만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공의 정무적·단기적 판단과 늘공의 전문적·장기적 판단은 적절한 비율로 섞여야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정무적 판단과 전문적 판단이 잘 어우러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발연대의 대통령들은 기본적으로 관료집단의 전문적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그때그때 적절한 정무적 판단을 버무려 나라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최근 늘공의 전문적·장기적 판단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한마디로 행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행정을 압도하고 있어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였던 정치와 행정 간 견제와 균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예산권을 쥐고 있으며 부총리가 수장인 기획재정부는,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만든 예비타당성조사 제도를 일거에 무너뜨리면서 무려 24조원이라는 예타 면제사업을 용인했다. 과거 같으면 균형을 잡았을 늘공의 전문적 판단이 어공의 정무적 판단에 굴복한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작지만 유능한 정부`라는 정책 기조를 유지해 왔다. 이로 인해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원 1명 늘리기도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 들어와서는 공무원 17만4000명을 포함해 총 81만명의 공공부문 정원을 늘리기로 했고, 아마도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당초 목표보다 훨씬 더 많은 공무원이 충원돼 공약 달성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례가 될 전망이다. 예산에 이어 공무원 정원에서마저 늘공의 전문적 판단이 어공의 정무적 판단에 무너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또 어떤가. 최저임금은 경제 주체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서서히 인상돼야 한다는 늘공의 지론이 어공의 정무적 판단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처참한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최근 고용 동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국민연금과 건보 재정의 적자 전환 우려와 탈원전 등 그동안 늘공들이 중심을 잡고 장기적 합리성을 추구하던 사업들이 어공의 정무적 판단에 밀리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행정의 전문성이 무너진 채 융성한 나라는 없다. 때론 융통성이 없어 보이거나 당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보여도 늘공의 전문적 판단이 어공의 정무적 판단에 맞서고 그 두 가지 판단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요즘처럼 늘공을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게 해서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기야 안보도, 외교도, 사법도, 기업도 무너지고 있는데 웬 행정 타령이냐고 하면 딱히 해줄 말이 더 없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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